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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특별법, 노상객사(路上客死)와 인재(人災) 논하기 전에 피해보상 우선돼야? | |||||
호프만식 계산, 30년 한 사람당 국민소득 50%인 3~5억 선 배상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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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3일장을 치르고, 3일 후에 삼우제(三虞祭)를 지낸다. 이때 유가족은 망자(亡者)를 성묘(省墓)한다. 이때 남은 가족이 장지에 가서 제상을 차리고 다시금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또한 잔디에 물을 주거나 두드려 죽은 이의 옷이 잘 짜이도록 돌본다. 궂은일을 했던 상여꾼들을 초청하여 거나하게 음식을 차리고, 마당엔 멍석을 깔아 윷판을 벌여 대접한다. 판이 커지고 술에 취한 상여꾼들이 서로 윷 던지기에 부정이 있었다고 멱살잡이하고 주먹이 오간다. 상주는 긴 싸움을 말리며 사랑하는 이의 상실감을 잠시 잊는다.
농사철이야 서로 화해하고 끝나지만, 농한기엔 자리를 옮겨 마누라들 눈길을 피해 외진 산기슭 초가의 골방으로 옮겨 외상 쌀가마가 오가는 화투판으로 커진다. 날이 이슥해지면 눈에 불을 켠 부인들이 떼 지어 오고, 노름꾼 서방들은 마누라를 두들겨 패거나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집으로 끌려간다. 겨울 초상이 나면 봄이 오도록, 온 동네에 화투판으로 도망가는 서방과 말리려는 아내들의 갬블 체이서(gamble chaser-도박 추격전)로 빈궁한 마을에 들썩였다.
이 왁자지껄한 상갓집 상여꾼들의 도박판으로 거리에 고함과 우는 소리를 잠재우는 것은 이름 모를 현명한 아내의 고자질이었다. 볼과 관자놀이에 버짐 머리엔 기계독을 단 자식이 주렁주렁한 진봉댁 아내에겐 잃을 것이 없었다. 지서(支署)에 가 순사(巡査)에게 노름판을 고해서 그나마 달그락거리는 살림을 챙기는 것이 서방의 무지막지한 발길질보다 더 시급했다. 꼴에 서방이라고, 동네 우세를 당한 서방은 이제 삼거리 주막 외상 막걸리에 취하기만 하면, ‘개 닭 쫓듯’이 숨은 마누라를 이집 저집 헛간을 뒤지며 고함을 고샅길에 뿌리고 다녔다. 이 지루하고 소모적인 가정 분란을 끝내는 것은 우수 청명 후 앞산 등성이에 냉이 쑥이 솟아오를 초봄쯤이 돼서야 끝났다.
봄이 돼서야 정신을 차린 서방은 대문 옆에 푹 썩혀둔 거름을 지게에 지고 동구 밖 산등성이 선산 밭에 내다 버렸다. 진봉댁은 강목 겨울 이불을 뜯어말려 갈음해두고, 초등학교 개학을 앞두고 뒷동네 이발소에 자식들을 데려갔다. 투전으로 자식들 이발비도 없는 서방은 가장이랍시고 이발사에게 치부(置簿)를 부탁하며 큰소리와 함께 넉살 좋게 웃었다. 이때쯤부터 진봉댁이 서방을 향해 째려보기 시작했고, 허세와 폭력과 막걸리로 가족을 괴롭힘을 일삼은 서방에 대한 기가 꺾이고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가난한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고 이 굴레는 돌고 돌았다. 이와 서캐가 목덜미와 겨드랑이를 뜯어먹던 내 유년 기억의 한 편린이다.
간 사람을 위해 남겨진 사람들이 겪어야 할 소란이었지만, 일상다반사 통과의례로 여겨 그 누구도 상갓집을 원망하지 않았다. 기억이 가물거려지도록 고샅길에서 상주를 만나면 혀를 차며 그 깊은 애통함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공동체 일원으로서 암묵적으로 나누는 금기요 의무로서 뜨거운 뭔가가 흘렀음에 분명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미지근한 물로 온몸을 닦는다. 대나무로 엮은 판(板)에 망자를 뉜다. 사람의 몸에서 액체가 나오는 구공(九孔)을 솜으로 막고 삼베로 염(殮)을 한다. 죽으면 근육이 경직돼 뻣뻣해진다. 시신을 세 부분 아래에 들 수 있도록 흰 강목 띠를 넣는다. 입관(入棺) 후 방안에서 마루로 나올 때 복숭아나무 가지로 관을 두드린다. 옥황상제의 회초리로서 이승에 얻은 악귀를 때려 떼어놓는 의례다.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설 때 선 상여꾼은 뒤집어 놓은 박적을 무릎을 들어 힘 있게 깨뜨린다. 망자의 혼은 이승을 떠나 중음(中陰)으로 떠나 49일 동안 공과(功過)를 심판받는 천국과 지옥의 등급별 행선지를 미결수 상태로 기다린다.
내 유년의 별명은 ‘대추 씨’다. 너무 마르고 허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왜소하나 강단지게 자라나서, 칠백 년 묵은 은행나무 꼭대기에 달밤에 올라 열매를 따고, 칠월칠석날 밧줄을 타고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내 몫이요, 보상 음식은 차고 넘쳤다. 고등학교 일 학년부터는 산 상여꾼 대접을 받았다. 삼우제까지 6일간 동네 초상집은 내 만한정석 뷔페 집으로 삼아 하이에나처럼 내달렸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릴 적 상갓집이 내 영양부족을 채우고, 상주 도박꾼 동네 아주머니 지서의 순경 역할과 연관이 경위(經緯)로 짜인 천태만상 인간사 한 토막이었음이 분명하다. 떠난 자가 남겨진 무리에게 보내는 무언의 가르침이자 깨달음의 사다리를 놔준 것임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상여꾼 노래를 따라 잘 불렀다. 눈물보다는 흥(興)이 절로 나는 오페라의 테너였다. “어우어우야 어우어유야/ 북망산천 멀다더니 대문 밖이 황천이네/ 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젊은총생 장담말게 가는 것은 순서 없네/ 어우어유야 어우어우야/ 만석지기 자랑말게 빈손왔다 빈손 가네/ 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내가가면 너도가고 진시황도 못피하네/ 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우리어매 슬퍼마소 내먼저가 자리잡네/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우리자식 참욕봤다 없는살림 덜어주마/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안볼란다 안들린다 큰맘먹고 잘살거라/ 어우어우야 어우어우야~ ”
장지에 가면서, 상여꾼들은 모퉁이 다리 고갯길 곳곳에 상여를 세워 저승 노잣돈을 뜯어 새끼줄에 달았다. 이 돈은 삼우젯날 상여꾼들을 불러 대접하고 고인 생전에 대한 덕담을 나누는 식사 자리를 만드는 데 쓰였다. 하관(下棺)과 함께, 고인을 모셨던 화려한 꽃상여는 밭이랑 위에서 부서져 불에 태워졌다. 이승의 마지막, 단 한 번 자신을 감쌌던 형형색색의 호사스러운 꽃들은 검은 티끌로 사방에 흩어져 날아갔다.
죽음에 상하좌우 부귀 빈천이 없다. 부자라고 꽃상여를 두 번 탈 수 없다. 요즘, 이 년 전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뒷골목에서 노상객사 비명횡사한 159위의 원혼들을 놓고 정치권이 해도 너무 한다.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십구재를 거쳐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인륜의 기본임에도 유가족을 괴롭혀 깊은 통분을 느낀다. 여야 정치권이 죽은 159위 참사 배상비 논쟁은 비윤리적인 면이 있다.
여당 주장은 간결하다. 이태원 참사는 인재(人災)로서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다. 또 그 자리에 추도 석물을 설치하는 것은 정권 책임과 민심 악화를 부추기는 것임으로 반대한다. 세계적으로 볼 때, 곳곳에서 벌어졌던 경기장 압사 사건과 성격이 비슷하고, 또 핼러윈 대회에 제 발로 걸어왔기에 사망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1인당 배상비 2천만 원과 장례비 1천5백만 원이면 충분하고, 야당과 협의하여 추후 배상액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야당의 주장은 다르다. 정치투쟁을 떠나 국가의 질서유지 책무를 다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보상과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추도 석물을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잔인하지만, 인체 장기의 의학적 가치만을 놓고 볼 때 1인당 2억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청춘이 구만리 같은 159위의 유가족에게 배상금 2천만 원은 우롱금이라는 것이다.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볼 때, 청년들이 평균 30년 경제활동 가정을 상정하면 1인당 국민소득 평균, 연간 4천만 원 수입 중 50%, 즉 6억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한다. 시민의 잘못보다 국가가 질서유지 대책 없이 인해 발생한 인재다. 교통경찰 20명만 선제적으로 배치했어도 159위의 원혼(冤魂)을 막았을 것이다. 집권당의 실정과 총선 전 민심 악화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막으려 유가족을 투명 인간으로 방치하는 것은 정서적 살상 행위임이 분명하다.
민주당은 159위의 추도 석물을 이태원 그 거리에 설치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유가족 159위에 대한 배상금 1인당 3억~5억을 시급히 여당과 종결지었으면 한다. 여당을 영구히 조리돌림 하는 것도 정권 심판으로 비화하는 투쟁적 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항공기는 10만여 개의 부품으로 조립된다. 자동차는 수천 개로 구성된다. 수많은 국정 중 부품과 과정이 잘못됐다고, 비행기나 자동차를 전부 폐기하는 것은 차후 유사 사례로 국가는 혼란을 뒤집어쓰고, 민심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죽은 자에 대해선 극진한 예우를 해서 영면에 들게 하는 게 우리의 관습이다. 분명한 것은 교통질서를 담당한 경찰에게 책임이 있고, 관리 감독을 잘못한 국가는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여야 정치적 파급효과를 놓고, 특별법이니 거부니 하고, 총선을 앞둔 대치가 다시 해를 넘길까 우려된다.
무엇보다도, 일상과 생업의 변두리에서 괴로워하는 유가족들에게 1인당 2천만 원 배상금 1천5백만 원 장례비는 사망 전까지 양육 지원비 발끝에도 어림없다. 5억 전후한 배상비를 시급히 유가족에게 지급했으면 한다. 희생자 위령비는 크기와 장소를 여야가 정하는 교섭 절차는 다음이다. 4,19 5,18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투사는 아니지만, 공권력의 방치와 무대책으로 억울하게 사망한 것은 분명하다. 여당의 ‘운동장 군중 압사’ 인식을 버려야 한다. samsohun@naver.com
*필자/이래권 작가.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Itaewon special law, should compensation for damages be given priority before discussing street vendor deaths and human casualties? Hoffman-style calculation, compensation should be in the range of 300 million to 500 million per person over 30 years, which is 50% of national income! -Writer Raekwon Lee When a person dies, a three-day burial is held, and three days later, the Samwooje (三虞祭) is held. At this time, the bereaved family pays a private funeral to the deceased. At this time, the remaining family goes to the funeral home, prepares an offering, and prays again for a return to paradise. They also take care of the deceased's clothes by watering or patting the grass. They invite the bier workers who did the dirty work, prepare a sumptuous meal, spread mats in the yard, and host a game of yut. As the situation escalates, drunken bier workers grab each other's collars and exchange fists, accusing them of dishonesty in throwing yut. Sangju breaks up a long fight and forgets for a moment the loss of his loved one. During the farming season, they end up making peace with each other, but during the off-season, they move to an alcove in a thatched house at the foot of a remote mountain to avoid the attention of their wives, and grow into a Hwatu board where bags of rice are passed around. As the sun rises, women with fire in their eyes come in droves, and gamblers beat their wives or are dragged home like spoiled puppies. As spring came after winter, the impoverished village was filled with gamble chasers, with wives trying to stop Seo-bang, who was running away with a Hwatu game. It was the nameless, wise wife's taunt that silenced the shouting and crying on the street due to the noisy gambling scene of the merchant's housewives. Jinbong's wife, who had ringworm on her cheeks and temples and a child with mechanical poison on her head, had nothing to lose. It was more urgent to go to the police station and inform the police officer about the gambling situation and to take care of the slightest bit of household expenses than the cruel kicks from the West. The West, who was said to be the worst in the neighborhood and was the dominant one in the neighborhood, now gets drunk on makgeolli from the tavern at the three-way intersection, ‘like a dog chasing a chicken’, searching from house to house and barn after barn for his wife, shouting at them all over the streets. It was not until early spring, when shepherd's purse began to sprout on the ridge of Apsan Mountain after Usu and Cheongmyeong, that this tedious and wasteful domestic strife would end. Seo-bang, who came to his senses only in spring, carried the rotted manure next to the gate on his back and threw it away in the Seonsan field on the ridge outside Dong-gu. Jin Bong-daek tore up the Kangmok winter blanket to dry and replaced it, and took her children to the barbershop in the back neighborhood ahead of the start of elementary school. Seo-bang, who did not have money to pay for his children's haircuts due to fighting, was the head of the family and asked the barber to trim his hair, laughing loudly and cheerfully. From around this time, Jin Bong-daek began to glare at Seo-bang, and began to show signs of discouragement towards Seo-bang, who had been harassing his family with bravado, violence, and makgeolli. Peace finally came to the poor family, and this cycle came back and forth. This is one of my childhood memories of lice and nits eating away at my neck and armpits. It was a turmoil that those who were left behind had to go through for those who had gone, but no one held a grudge against the mourning house as they regarded it as a common rite of passage. As his memories faded, whenever he met Sangju on Gotaetgil, he clicked his tongue and sympathized with his deep sorrow. It was clear that something hot must have flowed as this was a taboo and duty implicitly shared as a member of the community toward the dead. When a person dies, the entire body is first washed with lukewarm water. He laid the dead on a board made of bamboo. The orifice where liquid comes out of the human body is blocked with cotton and dried with hemp. When you die, your muscles stiffen and become stiff. White steel bands are placed under the three parts to hold the body. After entering the coffin, when coming out of the room onto the floor, the coffin is tapped with a peach tree branch. It is a ritual used by the Jade Emperor to beat away evil spirits acquired in this world. When stepping down from the floor to the earthen floor, the standing bier lifts his knee and breaks the overturned bakjeok with force. The soul of the deceased leaves this world and goes to the Middle Yin, where it waits as an unconvicted prisoner for 49 days for its destination in each level of heaven and hell, where its merits and demerits will be judged. My childhood nickname was ‘Mr. Jujube.’ It was given this name because it was so thin and weak. It was my responsibility to climb the top of the 700-year-old ginkgo tree on a moonlit night to pick fruit, and to go down to the bottom of the well on the sev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by rope, and the reward food was plentiful. From the first year of high school onwards, I was treated like a mountain bier. For the six days leading up to Samwooje, I ran like a hyena, using the neighborhood funeral home as my standard buffet. It may be a bit of an exaggeration, but it is clear that when I was young, living in a mourning house made up for my lack of nutrition, and that it was a piece of human history that was intertwined with the role of police officer of Jiseo, the local lady who was a resident gambler. I can only be grateful that this is an unspoken lesson from the departed to those left behind and a ladder to enlightenment. I sang along well with the bier song. He was an opera tenor who brought more excitement than tears. “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 outside the gate it’s a long way to the Bukmangsancheon/Bukmang Mountain Stream/Young bachelor, don’t tell me, there’s no order to go/E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 Oh, oh, oh, oh, if I go, you go too, and Qin Shi Huang can't avoid it/ Oh, my mother, don't be sad, I'm the first to settle down. 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d On the way to the funeral, the bier traders set up biers at various corners of the bridge and up the hill and took money from the underworld and hung it on a rope. This money was used to create a meal where Samwoojenal bier workers were invited and treated and good words were shared about the deceased while he was still alive. Along with the lower coffin, the colorful flower bier that served the deceased was broken on the furrow and burned. At the end of this life, the colorful and extravagant flowers that had once surrounded me flew away, scattering everywhere as black dust. In death, there is no wealth or poverty, either up or down or left or right. Even if you're rich, you can't win the flower bier twice. These days, the political world is going too far over the 159th-ranked vengeful souls who tragically died as a street vendor in the back alley of the Hamilton Hotel in Itaewon two years ago. Although holding a formal funeral and sending someone from this world to the afterlife through the forty-nine rites is the basis of humanity, I feel deep resentment for torturing the bereaved family. The debate over compensation for the 159th disaster, in which the ruling and opposition parties died, is unethical. The ruling party’s argument is concise. The Itaewon disaster was a man-made disaster and had a force majeure aspect. We also oppose the installation of a memorial stone at that site because it would increase responsibility for the regime and worsen public sentiment. From a global perspective, it is similar in nature to the stadium stampedes that have occurred all over the world, and since they walked to the Halloween event on their own, those who died are also responsible. A compensation fee of 20 million won per person and a funeral cost of 15 million won is sufficient, and the amount of compensation will be increased in the future through consultation with the opposition party. The opposition party's argument is different. Regardless of the political struggle, the country failed to fulfill its responsibility to maintain order, so appropriate compensation and the memorial stone requested by the bereaved families must be installed. Although it is cruel, considering the medical value of human organs alone, they are worth more than 200 million won per person. For the 159th-ranked bereaved family, whose youth is like Gu Man-ri, 20 million won in compensation is a ridiculous amount of money. According to the Hoffman method of calculation, assuming that young people are economically active for an average of 30 years, 50% of the average per capita national income of 40 million won per year, or 600 million won, should be paid as compensation. It is a man-made disaster caused by the government's lack of measures to maintain order rather than the fault of citizens. Even if only 20 traffic police had been preemptively deployed, the 159th ranked vengeful spirit would have been prevented. It is clear that neglecting the bereaved family as invisible people in order to prevent the ruling party's mismanagement and adding fuel to the deterioration of public sentiment before the general election is an act of emotional murder. The Democratic Party would like to postpone the installation of a memorial stone for the 159th on the streets of Itaewon and urgently conclude a settlement with the ruling party on compensation of 300 million to 500 million per person to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159th. It is pointed out that there is a need to change the combative stance that permanently criticizes the ruling party, which escalates into a judgment of the government. An aircraft is assembled from over 100,000 parts. A car is made up of thousands of pieces. Among the numerous national affairs, discarding all airplanes and automobiles because of faulty parts and processes is a similar case in the future, throwing the nation into chaos and public sentiment being thrown to the ground. It is our custom to treat the dead with the utmost respect and allow them to rest in peace. What is clear is that the police in charge of traffic order are responsible, and the state that made a mistake in management and supervision must bear unlimited responsibility. There are concerns that the standoff ahead of the general election, over the political ramifications of the ruling and opposition parties, and whether it is a special law or not, will continue for another year. Above all, for bereaved families suffering on the outskirts of daily life and livelihood, the 20 million won per person in compensation and 15 million won in funeral expenses is not even close to the cost of childcare support until death. I hope that compensation, around 500 million won, should be paid to the bereaved family as soon as possible. The negotiation process for the ruling and opposition parties to determine the size and location of the memorial to the victims is as follows. 4,19 5,18 Although he was not a fighter who participat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t is clear that he died unfairly due to the neglect and inaction of public authorities. We must abandon the ruling party’s perception of a ‘crowd stampede in the playground.’ samsohun@naver.com
*Writer/Writer Raekwo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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